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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조선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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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릉은 조선 단종의 능으로, 강원도 영월에 위치해 있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유배되었고, 17세에 사약을 받고 사망하여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갔으나, 호장 엄홍도에 의해 암장되었다. 이후 중종 때 묘를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선조 때 석물을 세우고,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면서 장릉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장릉은 정자각, 단종비각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조선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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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조선 단종)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영월 장릉 전경
영월 장릉의 전경
유형사적
지정 번호196
지정일1970년 5월 26일
주소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산131-1)
시대조선시대
소유문화재청
면적3,495,236m2
웹사이트문화재청
이름영월 장릉 (寧越 莊陵)
로마자 표기Yeongwol Jangneung

2. 역사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1]

이후 시신은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안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임금의 무덤이라 능이 아닌 묘의 지위를 받아 노산군묘라 지어졌으나,[1] 민간에서는 단종의 능침을 노릉(魯陵)이라 불렀다. 영월 보덕사는 노릉사(魯陵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610년(광해군 2년)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노릉사를 공식 명칭으로 썼다.

중종 11년(1516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우승지 신상(申鏛)은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고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으며 주변에는 민간의 무덤들이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 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24년(1698년)에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2][3]

경내에는 정자각, 단종비각, 영천, 배식단, 재실, 홍살문 등이 있으며, 울창한 노송의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능의 양식은 왕명에 따라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2개, 문석(文石) 2개, 석수(石獸) 여러 개가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4]

비수도권 지역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며 다른 조선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2. 1. 왕위 찬탈과 유배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지금의 강원도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1]

2. 2. 사사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지금의 강원도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1]

당시 고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시신은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 때문에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안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2. 3. 시신 수습과 암장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단종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지 못하고 강물에 떠다녔다. 이때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1] 이로 인해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왕릉을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2. 4. 묘역 조성과 추존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단종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지 못하고 강물에 떠다녔으나,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로 인해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임금의 무덤이라 능이 아닌 묘의 지위를 받아 노산군묘라 지어졌으나,[1] 민간에서는 단종의 능침을 노릉(魯陵)이라 불렀다. 영월 보덕사는 노릉사(魯陵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610년(광해군 2년)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노릉사를 공식 명칭으로 썼다.

중종 11년(1516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우승지 신상(申鏛)은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는데,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고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으며 주변에는 민간의 무덤들이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 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24년(1698년)에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2][3]

3. 구조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1]

고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시신은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임금의 무덤이라 묘 지위를 받아 노산군묘라 지어졌으나,[1] 민간에서는 단종의 능침을 노릉(魯陵)이라 불렀다. 《동국문헌명신편》에는 노릉으로 기록되었고,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책의 이름은 《노릉지 魯陵誌 2권》이라 명명되기도 하였다. 장릉 근처에 있던 영월 보덕사는 노릉사(魯陵寺)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릉사는 1610년(광해군 2년)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공식 명칭으로 썼다.

중종 11년(1516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제사가 이루어졌다. 우승지 신상(申鏛)은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는데,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고,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으며, 주변에는 민간 무덤들도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 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2][3]

장릉은 비수도권 지역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며, 다른 조선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3. 1. 경내 시설물

경내에는 정자각, 단종비각, 영천, 배식단, 재실, 홍살문 등이 있으며, 울창한 노송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4]

왕명에 따라 능 양식은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2개, 문석(文石) 2개, 석수(石獸) 여러 개가 있다.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신하들을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4]

3. 2. 묘역 양식

단종의 명에 따라 묘역은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2개, 문석(文石) 2개, 석수(石獸) 여러 개가 있다.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4]

4. 사진

5. 기타

장릉은 비수도권 지역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며, 다른 조선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1] 또한,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왕릉을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다.

참조

[1] 문서 조선왕조 임금의 무덤 중에서 묘 지위를 가진 곳은 서울 도봉구의 연산군묘와 경기도 남양주시의 광해군묘 둘 뿐이다. 이전에는 노산군묘라 불렸던 장릉까지 셋이었으나 숙종 때 능 지위로 격상되면서 현재까지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만 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 두 무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서도 제외되었다.
[2] 문헌 숙종실록, 숙종 24년(1698) 11월 6일(정축) 2번째 기사
[3] 웹인용 능이야기-장릉 http://royaltombs.ch[...] 문화재청 2009-05-21
[4] 백과사전 《글로벌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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